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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96 - 디테일에 강한 임금
 
김태균   기사입력  2020/11/30 [10:33]
▲ 세종신문 김태균 대표     
세종의 성격 중에 두드러진 부분이 세심함이다. 요즘말로 디테일이 강한 임금이었다. 디테일 즉 세밀함에 악마가 있다고도 하는 것을 잘 이해한 지도자인 셈이다. 
그리고 동시에 끈질긴 집념도 대단했다. 한가지 일을 시작하기는 많은 고민을 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성취를 이루어 낸 큰 재능일 것이다. 우리 범인들의 병폐가 '시작이 반‘이란 말을 하며 시작은 잘하면서 끝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종 3년 5월 7일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임금이 창덕궁 궁인(宮人)의 병자가 많음으로써, 이에 중궁(中宮)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겼다. 앞서 임금이 경회루 동쪽에 버려 둔 재목으로 별실(別室) 두 칸을 짓게 하였는데, 주초(柱礎)도 쓰지 않고 띠[茅草]로 덮게 하였으며, 장식을 모두 친히 명령하여 힘써 검소하게 하였더니, 이때에 와서 정전(正殿)에 들지 아니하고 이 별실에 기거하였는데, 지게문 밖에 짚자리가 있음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말한 것이 아닌데, 어찌 이런 것을 만들었느냐. 지금부터는 내가 명한 것이 아니면,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안에 들이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경회루 옆에 허름한 거처할 곳을 지었다. 주초 즉 기둥 돌받침도 쓰지 않고 초목으로 지붕을 얹은 가건물 내지는 초옥이었다. 이곳을 종종 이용했던 모양인데 잠시 창덕궁에 가서 정사를 보다 병자가 많으니 임금의 안위를 위해 경복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전에 있던 초옥 입구에 짚 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한마디 한 것이다. 모른척하고 넘어갈 법도 한데 '비록 작은 것이라도 내가 명한 것이 아니면 안에 들이지 말라‘고 명한다. 아마도 가뭄을 염려하고 백성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 하고픈 초옥으로 추정된다. 임금은 이런 목적에 반하는 사소한 후퇴도 용납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런 섬세함은 정사를 보는 회의장에서도 드러난다.
음력 5월 10일 경이니까 6월 중순 쯤이다. 봄가뭄이 심했다. 보리도 수확해야 하지만 벼도 심어야 하는데 비가 안 오니 큰 걱정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듯 하다. 그런데 그 말미에 <상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면 잠시도 즐거이 놀이할 수 없다.’하시니, 그와 같이 가뭄을 근심하시는 마음이 지극하신데, 하늘이 어찌 오래 가물어 비를 내리지 않을까 하였다.(3년 5월11일)>는 기록을 남겼다. 신하들 앞에서 아버지 태종의 마음을 알아주는 세심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세종은 천상 효자였다. 효에 관한 각별함은 어머니 원경왕후가 돌아가신 때에 그대로 보여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비가 내렸다고 실록은 적는다.
아버지 태종이 병권을 잡고 있는 와중에 세종은 평안하게 정사를 보고 익히는 좋은 시절이었다. 폭풍 같은 초반의 권력이양기의 불편함은 많이 지난 듯 하다. 얼마전 세종이 군사운용의 진법에 대해 변계량과 논의하여 진법 훈련을 지시한적이 있다. 그 열병식을 하게 된다. 5월 18일의 일이다.
 
임금이 상왕을 모시고 낙천정(樂天亭)에 거둥하여, 오위(五衛)의 진(陣)을 크게 열병(閱兵)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왕이 참찬 변계량에게 명하여,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여 진법(陣法)을 이룩하게 하고, 임금이 대궐 안에서 또 그린 진법(陣法) 한 축(軸)을 내어 주니, 변계량이 참고해서 연구하여 오진법(五陣法)을 만들어 올리므로, 훈련관(訓鍊觀)으로 하여금 이 진법에 의거하여 교습(敎習)하게 하더니, 이 때에 와서 삼군(三軍)이 변하여 오진(五陣)이 되었으나, 차례로 잃은 병졸이 없었다. 이미 열병(閱兵)을 하고나서, 인하여 손으로 서로 치는 놀이[手拍戲]를 보고, 술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연주하여 삼군(三軍)의 장수를 위로하였다.
 
군사운용의 묘는 병가에 속하는 일이다. 
아버지 태종은 평생을 칼을 옆에 두고 살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몸이다. 병권이 얼마나 중한지 알며 군사훈련과 진법에 대한 남다른 안목이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세종도 스스로 연구한 진법의 한 부분을 내어주며 군사훈련에 적용해 보라는 지시를 한 모양이다. 잘 작동하는 진법운용을 보고 만족한 장면이다. 위 글에서 나오는 손으로 치는 놀이-수박희-는 태껸으로 알려져 있다. 수박도라고도 한다. 이미 이때부터 군인들이 놀이의 일종으로 몸에 익히고 있었고 동시에 민족 고유무술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모양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열병을 한 2일 후 세종은 변계량에게 묻는다.
 
임금이 변계량에게 묻기를,
“지금 경이 지은 《진설(陣說)》 안에 적군(敵軍)에게 응전(應戰)할 즈음에, 후위(後衛)가 먼저 나가서 적군에게 응전한다는 설(說)과 부딪치는 곳에서 먼저 나간다는 설(說)은 모두 한 쪽에 치우친 듯하다. 내 생각에는 중위(中衛)의 주장(主將)이 임시로 포치(布置)하여 혹은 앞으로 가기도 하고, 혹은 뒤로 가기도 하고, 혹은 왼쪽을, 혹은 오른쪽을 가기도 하여, 그 주장의 지휘를 따르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계량이 아뢰기를,
“후위(後衛)가 먼저 나간다는 설은 오진 본법(五陣本法)에서 나왔으며, 부딪치는 곳에서 먼저 나간다는 설도 또한 제가(諸家)의 진법(陣法)에서 나왔으니, 모두 폐지할 수 없으므로, 그 설을 둘다 두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말한 바와 경의 말한 바를 빠짐없이 써서 올리라. 내가 장차 부왕께 아뢰겠다.”
하니, 계량이 두 조목을 써서 올리므로, 윤회(尹淮)를 보내어 상왕에게 계(啓)하였다.(3년5월20일)
 
세종이 단지 문사로서 군사훈련과 진법에 대해 열병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훈련을 위한 진법계획을 짤 때에도 진법의 한 축을 그려주었고 열병식을 보고 난 후에도 그 진법의 문제와 개선사항을 책임자에게 묻는다. 변계량은 당대의 석학이었다. 그와 이런 진법에 관한 디테일을 논하고 두가지 의견을 모두 잘 조합해서 상왕 태종에게 보고하라고 명하는 대목을 보며 지도자의 학습능력과 전문성 그리고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은 왜 세종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세종의 큰 업적들을 가능하게 한 축은 섬세함이었다. 수많은 악마들이 도사리고 있을 섬세한 그물코를 상세히 들여다 볼 줄 아는 능력이 위대한 지도자의 역량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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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30 [10:33]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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