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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휼 ②
조성문의 세종대왕 이야기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7/09/08 [11:42]
나라의 근본이 백성임을 알고있는 세종에게 민생고 해결은 마땅히 최우선의 정책이었다.
 
“근년 이래로 수재와 한재가 잇따라서 연년이 흉년이 들었고, 지난해가 더욱 심하여 민생이 불쌍하게 되었으니, 각도 감사와 수령들은 나의 뜻을 잘 받들어서 구제할 물품을 가지고 질병이 있거나 불구가 된 사람을 우선적으로 구제해 주되, 장차 조관(朝官)을 보내어 순행하여 물어 볼 것이니, 만약에 여염 가운데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었다면 중죄로 처단할 것이다.” 하였다. - 세종 3년 2월 5일
 
백성이 굶주린다는 소식에 망설임 없이 양곡을 퍼주다 보니 마침내 국가의 창고도 텅 비게 되었다. 지속적인 흉년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고갈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고의 손실을 우선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백성들이 빌려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마땅하고도 당연한 일이지만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호조에 전지하기를, “근래 해마다 계속하여 실농하였으므로 인하여 민생이 곤란한데, 왕년의 수많은 환상곡을 일시에 다 거둬들인다면 전토와 재산을 다 방매하여 그 살아갈 바를 잃을 것이 우려되니, 왕년의 환상곡을 보상하지 못한 자는 각도의 경차관으로 하여금 그 민호의 산업을 상고하여, 참작 재량하여 시행하게 해서 살아갈 바를 잃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 세종 5년 11월 22일
 
백성들로부터 환상하는 곡식을 받지 않고 받은 것처럼 허위 회계기록을 한 도내 수령들을 처벌할 것을 강원도 감사 황희가 청하자 수령을 죄주면 그 여파가 백성에게 미칠 것을 걱정한 세종이 이를 저지하였다.
 
“근년에 강원도가 실농됨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살 수 없어 늙은이와 어린이를 이끌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만약 환곡을 받지 못하였다고 수령들을 죄주는 것은 실로 잘하는 일이 아니니 거론하지 말라.”  - 세종 6년 2월 5일
 
지나치게 수령의 재량권을 통제하다가 행여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까 거정되어 수령이 재물을 사용해도 가한 조목을 나열하여 법을 제정하는 방안을 논의하게 하였다.
 
“수령은 백 리 되는 지방의 명을 맡아서, 한 고을 주인이 되었으니, 그 〈전곡(錢穀)을〉 모으고 흩고 베풀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만약 늙고 병든 이에게 은혜를 베풀어 기르고, 홀아비[鰥]와 홀어미[寡]에게 구휼하는 일이며, 부조하고 은혜 베푸는 일들을 모두 부정[臟]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근년에 수령들 중 죄를 받은 사람은 그 초상과 장사에 부조한 물품을 부정으로 계산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주는 것까지 금하는 것은 꾸러미에 싸서 뇌물을 보내는 것 때문에 법을 세운 것이다. 만약 법으로서 구속하여 궁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호하는 일도 자유로 할 수 없게 하면 고을을 위임시킨 뜻에 어그러지는 것이니, 이지강(李之剛)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에 법을 세우기를 청했으나 지금껏 정하지 못하였다. 수령의 구호하는 일들과 부조하고 상주는 일 및 의(義)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논하지 말기로 법을 세우는 것이 어떠할까.” - 세종 7년 11월 14일
 
신하들과의 논의는 계속되었다. 백성들에게 빌려준 곡식을 상환하라는 수령들의 독촉을 중지하자는 의견을 임금이 냈기 때문이다. 금년에 일시적인 풍년이 들었는데 이를 기화로 백성들에게 빚을 갚으라 재촉하면 백성들이 괴로울 것이라고 여기 것이 세종이다. 신하들의 주장은 조금 달랐다. 풍년이 되었으니 환상을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해에도 빚을 감해 주었는데 이제 또 거두지 않는다면 부자들도 영구히 면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환상을 바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에 세종은 의창이라는 것이 백성들을 위해 설치한 제도적 장치라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니 그 창고가 비었다고 강제로 거두어들이면 가난한 백성들은 있는 것을 모두 빼앗기기 때문에 식량의 어려움이 흉년과 다름없을 것이니 백성들의 빈부의 차이를 살펴 형편에 맞게 환상을 걷자고 새로운 제안을 한다. 신하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거두지 않자 세종은 짐짓 다른 주제로 말머리를 돌린 뒤 신하들을 내보내고 대언들에게 명령한다.  
 
계주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니,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환자를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인해 백성들이 괴로워한 지가 오래다. 대신들은 이르기를, ‘군량은 허술히 할 수 없으니 마땅히 평상시에 미리 저축하여 뜻밖의 환란을 구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도 이 말을 진실로 옳게 여기는 바이다. 그러나 근년에는 여러 해 동안 풍년이 들지 않아서 백성들의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다가, 다행히 금년이 조금 풍년이 들었을 뿐인데, 만일 1년의 풍년을 가지고서 전일의 묵은 빚을 모두 받아들이고 보면, 환과고독들은 반드시 곤궁한 지경에 이를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이 뜻을 수령들에게 유시하고 경들은 10월을 기다려 다시 아뢰도록 하라.” - 세종 10년 8월 5일
 
국고를 채우기 위해 골몰하던 세종은 먼저 내부에서 절약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다.
 
청컨대, 사부학생(四部學生)들의 공급과 각처 원리(員吏)의 점심과 공장(工匠)의 급료를 줄이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18년 7월 16일
연사(年事)가 흉년이므로 금년 가을의 군복과 갑옷의 점고(點考)를 정지하고, 또 각 고을의 향교(鄕校)는 정사년 추수기까지 기한하여 모두 방학하게 하고, 그 교관도 또한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봉급을 정지하게 하였다. - 세종 18년 8월 7일
청하옵건대, 각품의 봉록을 감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라서 1품으로부터 2품까지는 콩 3석을 감하고, 3품으로부터 6품까지는 콩 2석을 감하고, 7품 이하는 콩 1석을 감하고, 면주(綿紬)와 정포(正布)와 동전(銅錢)은 모두 전감(全減)하였다. - 세종 19년 1월 6일
 
아랫사람들에게 내핍을 강조하면서 자신은 뒷짐만 지고 있을 세종이 아니었다. 즉각 자신의 아들과 사위의 과전을 줄일 것을 명령하였다.
 
“백관의 정1품 과전이 1백 50결인데 대군의 밭이 3백 결이니 너무 많은 것 같다. 비록 50결을 감하더라도 각품에 비교하면 오히려 백 결이 더하니, 어찌 차등이 없다고 하겠는가. 진양대군(晉陽大君)·안평대군(安平大君)·임영대군(臨瀛大君)은 전에 받은 과전 3백 결에서 각각 50결을 감하고, 부마 연창군(延昌君)은 전에 받은 과전 2백 50결에서 역시 30결을 감하라. 금후로는 대군의 밭은 2백 50결에 지나지 말게 하고, 여러 군의 밭은 1백 80결에 그치게 하라. 이 토전(土田)을 감하는 것이 어찌 천견(天譴)에 답하고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러나 공경하고 두려워하기를 심하게 하매,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호조에 명하여 영구한 법으로 만들었다. - 세종 19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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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08 [11:4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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