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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정책(徙民政策)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8/01/04 [12:20]
‘일의 기회가 왔으니 절호의 시기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내가 선인들의 뜻을 이어 이루어서, 다시 경원부(慶源府)를 소다로(蘇多老)에 되돌려 옮기고, 영북진(寧北鎭)을 알목하(斡木河)에 옮긴 뒤에, 이주할 백성들을 모아서 충실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리하여 삼가 조종으로부터 물려받은 천험의 국토를 지키고, 변방 백성들의 교대로 수비하는 노고를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자 할 뿐이니, 큰 일을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즐겨하여 국경을 열어 넓히려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이 여진정벌을 끝낸 직후 변방을 지키기 위해 백성의 이주정책을 펼친 세종의 포부였다.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의 국경지역은 농사도 짓고 방어도 해야 하는, 그야말로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해야 하는 곳이었기에 적극적인 사기 진작책이 필요했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충청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 등의 도에서 자원하여 이주할 사람을 모집하되, 양민(良民)이라면 그곳의 토관직을 주어 포상하고, 향리(鄕吏)나 역리(驛吏)라면 영구히 그의 이역(吏役)을 해제하여 주며, 노비(奴婢)라면 영구히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여 주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15년 11월 21일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돌아온 대사헌 이숙치에게 여연(閭延)의 방어대책을 물었다.
 
“남도(南道)에서 부방(赴防)하는 군사들이 기숙함에 먹는 것이 부실해 심신이 피로하여, 적의 칼날을 대하기도 전에 사기가 먼저 꺾이므로, 나는 다른 고을의 백성들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사시(四時)를 통하여 그 방어를 모두 토병(土兵)으로 하게하고, 객병(客兵)이 멀리 와서 노고하는 폐단을 없게 하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경이 물러가거든 여러 대신들과 잘 의논하여 계달하라.” - 세종 17년 1월 25일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함길도에 입거하는 사람을 전심으로 구호하게 하였다.
 
경상·전라·충청·강원 네 도(道)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지금 함길도에 사군(四郡)을 신설하고 용성과 길주의 백성을 옮기어 채웠으므로, (중략) 부득이하여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백성과 아전을 옮기어 용성과 길주의 땅을 채우고 영구히 구실을 면제하고 벼슬길을 허락하는 것이다. 옮길 때에 굶주리고 얼어서 엎드러져서 넘어지게 될 염려가 있으니, 압령(押領)하는 수령들로 하여금 힘써 보호하고 구휼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 하고, 만일 병에 걸린 사람이 있거든 더욱 호휼(護恤)을 가하여 생명을 잃는 일이 없게 하여, 내 뜻에 부합하게 하라.” 하였다. - 세종 19년 1월 4일
 
처음부터 사민정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실망하지 않았다.
 
“(중략) 뜻밖에 첫해의 큰 눈과 이듬해의 큰 역질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고, 지난해의 적변으로 피로되고 피살된 자가 적지 않았다. 비록 그렇다 해도, 내 뜻으로는 오히려 대사를 이루려면 처음에는 반드시 순조롭지 못한 일이 있어도 후일의 공효는 반드시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세종 19년 8월 6일
 
평안도 경차관 조순생은 지방의 수령이나 백성들이 사민정책에 비협조적이라고 보고하였다.
 
“(중략) 오늘날 남도에 살던 백성 7백 호를 연변 각 고을에 분정하여 들어가 살게 할 때, 각 고을의 수령이 부실(富實)한 민호(民戶)만을 뽑아 내어서 혹 2, 3호로 한 호를 만들어서 보냈사오나, 그 사람들이 이름은 비록 부실이라 하여도 실상은 빈한하옵고, 본래 한 호의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 마음이 같지 아니하여, 겨우 들어가 살 지방에 도착하면 계속하여 도망하여 흩어지옵니다. 수령이 즉시 공문을 보내어 찾아내게 하오나, 중간에 도망가 숨고 본가로 들어가지 않은 자가 퍽 많사오며, 또 남도의 백성은 현재는 들어가 살지 아니하지만 몇 해 뒤에는 들어가 살게 될까 두려워하여, 피하려고 계획하여서 거짓 빈약한 체 하노라고 혹은 집을 헐고 초막을 짓고, 혹은 손을 놀려서 농사를 폐지하오니, 수년을 지나지 아니하여 민가의 호수가 감손하여 거의 없어질까 그윽이 염려되옵니다.” - 세종 21년 10월 22일
 
사민정책이 실시되고 있는 현장의 상황을 세세히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중략) 또 들으니, 4진(鎭)의 백성이 서로 이사(移徙)한다고 하는데, 과연 소문과 같은가. 그것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또 경성(鏡城)도 역시 깊은 곳에 있는데도 그 백성으로서 옮겨 이사하는 자도 없는데, 오직 4진 백성만이 이와 같이 많이 유망(流亡)한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와 같이 서로 잇달아 도망하여 저 땅이 날로 감(減)하고 달로 줄어들건만, 관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또는 계속해서 야인에게 포로되어 가건만, 관리가 비록 이를 알더라도 죄책을 면하려고 은폐하고 보고하지 아니하는 것인가. 수년이 아니 되어 1천 6백 50여 인이 감손(減損)된 연고를, 다시 상세하게 사실을 조사하여 계달하라.” 하였다. - 세종 22년 3월 15일
 
세종 15년에 시작된 함길도의 사민은 총5,560호로 5차례에 걸쳐 55,000여명이 이주했다. 세종 18년에 시작된 평안도의 사민은 총6,561호로 4차례에 걸쳐 65,000여 명이 이주했다. 
고향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이 상정에 역행하면서까지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촌토(尺地寸土)라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을 지켰던 세종은 늘 괴로웠다.
 
“재물이 다했으니 무엇을 입으며, 식량이 다했으니 무엇을 먹으며, 힘이 다했으니 어떻게 하며, 도망을 다했으니 누구를 부리겠는가. (중략) 네 진을 설치한 것이 장차 공효가 있겠는가. 백성의 재력이 장차 다할 것인가. 백성의 원망이 날로 더욱 더할 것인가. 네 진의 민심이 장차 안정될 것인가. 야인의 변이 장차 종식(終息)될 것인가.” - 세종 19년 8월 6일
 
세종의 고단한 마음을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가 위로하였다.
 
“성상의 방책이 신묘하시어 한 사람의 아전을 매질하지 아니하고, 한 사람의 백성도 형벌하지 아니하고도 수만이나 되는 군중이 겨우 한 달이 지나자마자 새 땅에 다 모이어, 대사가 쉽게 성취되고 새 고을이 영구하게 세워졌으니, (중략) 지인(至仁)이 널리 미쳐서, 추위에 떠는 자는 옷을 입을 수 있고, 굶주리는 자는 먹을 수 있게 되어 백성들이 역사에 피곤하여도 그 노고를 잊어버리고, 군졸들은 수자리에 고생스러워도 그 괴로움을 잊었습니다.” - 세종 19년 8월 6일
 
이에 세종도 시름을 덜었다.
 
“내가 북방의 일에 대하여 밤낮으로 염려하기를 마지아니하였는데, 이제 경의 글월을 보니 가히 걱정이 없겠다.” - 세종 19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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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04 [12:20]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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