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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8/01/11 [11:59]
김종서(金宗瑞 1383-1453)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절재(節齋). 1405년(태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고 7년 동안 6진(六鎭)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김종서는 세종의 마음에 꼭 드는 신하였다. 즉위 초부터 세종의 눈과 귀가 되고 손과 발이 되어 준 신하였다. 김종서의 능력은 이미 태종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제학 최흥효(崔興孝)는 글씨 잘 쓰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태종이 친정(親政)하던 날, 제학이 이조 낭청으로 입시하였는데, 남의 고신(告身)을 쓰는데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리면서 한참이 지나도록 해놓은 게 없었다. 김종서(金宗瑞)가 병조 낭청으로 옆에 있다가 한번 붓을 들어 수십 장을 써내렸다. 다 쓰고 나서 옥새를 찍으니, 자체와 옥새 자국이 모두 단정하므로 태종이 돌아보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쓸 만한 인재다.” 하여 김종서가 이로 말미암아 떨쳐 일어났다. - <용재총화>
 
김종서에게 밤낮으로 공소에 머물면서 임금의 말을 밖에 전하게 하였다.

좌대언 김종서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병중인데다가 마침 사신의 일로 마음이 번거로운데, 환시(宦寺)들이 복잡한 사연을 다 전하지 못하는가 싶으므로 마음과 기운이 함께 피곤하니, 경은 지금부터 재계하고 밤낮으로 공소(公所)에 있으면서 나의 말하는 바를 듣고 밖에 선전하라.” 하였다. - 세종 13년 8월 18일

병조판서 최사강의 무고가 있었으나 세종이 풀어주었다. “만일 천일(天日)이 밝게 비치지 아니하셨다면 신은 죄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하고, 김종서가 흐느껴 울기를 마지 아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의 신임함이 되매 동류(同類)가 미워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 경은 부끄러워 말라. 이번 일 때문에 기가 꺾이지 말고, 더욱 심기를 가다듬어 전과 다름없이 봉공(奉公)하라.” 하였다. - 세종 14년 10월 30일

어머니의 죽음도 북방을 지켜야 하는 김종서의 유고를 정당화 시킬 수 없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서답(書答)하기를 “지금 올린 글을 보고 경의 뜻을 이미 잘 알았는데, 경이 친상(親喪)에 마음을 다하고자 한 것은 그 뜻이 진실로 좋다. (중략) 내가 생각하건대, 함길도는 지경이 저 오랑캐 땅에 연해 있으므로, 수비와 방어의 긴요한 것은 본디 다른 도의 비교가 아니다. 하물며 지금 새로 설치한 군·읍(郡邑)의 무유(撫綏)하는 방법은 또한 평상시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경은 옛일을 상고하는 힘과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있으며, 일찍이 측근의 관직에 있어 내 뜻을 자세히 알아서 중대한 임무를 맡을 만한 까닭으로, 일찍이 명하여 도관찰사로 삼았다가 또 도절제사로 옮겼는데, 북방에 오래 있어 지방 풍속을 자세히 보고, 적군의 약하고 강함과 백성의 진실과 허위를 자세히 다 알아서 처리함이 방법이 있었던 까닭으로, 내 뜻이 단연히 경으로써 북방의 책임을 맡기었던 것이다. 지난번에 마침 어머니 상사(喪事)를 당하여 군문(軍門)이 오래 비었으므로, 내가 심히 염려했는데, 이미 장사를 지낸 후에는 옛날의 기복시키는 예에 따라서 그전 임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 내 뜻으로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서소(書疏)가 비록 올라오더라도 마침내 따를 리가 없을 것이니, 결코 다시 올리지 말고 억지로 최질(衰絰)을 벗고 빨리 그 직책에 나아가라.” 하였다. - 세종 18년 1월 21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사면(辭免)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북문(北門)의 열쇠를 관리하는 데는 그 적임자가 아니면 맡길 수 없는 것이다. 근년 이래로 변경이 좀 조용해지고 인심이 점점 편안해진 것은, 경이 이룩한 공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4진(鎭)을 신설하여 견고하지 못하고, 야인이 처음에는 귀부(歸附)해 오나 믿기 어려우므로, 나의 기대하고 바라는 바가 바야흐로 깊은데, 경이 어찌 갑자기 사임하고자 하는가. 사면하지 말고 나의 바라는 바를 다하도록 하라.” - 세종 20년 11월 14일
 
사헌부에서 김종서를 탄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헌부에서 탄핵하려던 것은 어떠한 일들인가.” 하니, 도승지 김돈이 대답하기를 “신이 십여 가지 일이라고 들었사옵니다. 홀라온이 종서의 애기(愛妓)에게 뇌물을 바친 것을 그대로 서울에 보낸 것이 하나 이옵고, 전지(田地)를 주고 빼앗는 것을 자기 한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대로 한 것이 둘째 이옵고, 기복(起復)해서 진(鎭)으로 돌아갈 때에 안변(安邊)에서 기생을 데리고 경성(鏡城)으로 간 것이 셋째 이온데, 그 나머지는 신이 자세히 알지 못하옵니다.” (생략)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종서의 공은 크다. 그를 움직일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종서에게 전지하기를 “경은 부동(浮動)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라. 만일 그러한 병이 있다면 근신(謹愼)해서 조섭(調攝)하고 다시 더 심력을 다하여 그 직무에 충실하고 삼가도록 하라.” 하였다. - 세종 22년 1월 17일
 
박호문이 김종서를 헐뜯었다. 그러나 세종은 김종서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아니하였다.

“김종서의 공이 작지 아니하다. 새 백성들을 위무(慰撫)해서 모으고 여러 종족을 불러 항복받아서, 동북 한 지방이 조용하고 사변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의 큰 공이다. 예전에 고려 시중(侍中) 윤관(尹瓘)이 북방을 정벌하였는데, 온통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모두 그를 죽이기를 청하였었다. 그 때의 임금이 듣지 아니하고 그 임무를 전담하도록 하여서, 그 공을 이룩하게 하였다. 나는 죽이기를 청한 자가 옳은지 듣지 아니한 자가 그른지 모르겠다. 지금 본다면 관(瓘)의 후손으로서 왕실과 혼인을 맺은 자가 십여 인이나 된다. 고려 대신의 후예로서 윤씨 같이 성(盛)한 집이 없다. 그렇다면 듣지 아니한 자가 기필코 옳은 것이다. 옛부터 공을 이룬 뒤에 능히 목숨을 보전한 자가 드문 것이다.” -세종 22년 1월 19일
 
1440년(세종 22) 우리 땅에 들어와 대를 이어 살던 범찰과 동창이 부족을 거느리고 국경너머로 도망을 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세종은 1년 동안 10여 차례의 지시를 내리면서 변방을 굳게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국경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올량합과 머물러 있는 오도리 사람들은, 무휼하여서 안업(安業)하게 하라. (중략) 경은 여러모로 잘 계획하고 시기에 따라 잘 처리하라. 그리고 무휼하는 방법을 곡진하게 포치하여, 그들의 마음이 들뜨지 않고 안심하고 살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급무이다.” - 세종 22년 7월 9일

김종서에 대한 세종의 깊은 신뢰가 두만강유역을 안정시켰다.

“비록 내가 있었어도 김종서가 없었다면 사진(四鎭)은 능히 개척하지 못했을 것이요, 비록 김종서가 있었어도 내가 없었다면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 <해동명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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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11 [11:59]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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