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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덕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8/01/25 [11:01]
최윤덕(崔潤德 1376~1445). 본관은 통천. 호는 임곡. 아버지는 개국원종공신 최운해다. 3군도절제사로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였으며 1432년 겨울 파저강(婆猪江) 유역에 살던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신으로서는 드물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최윤덕의 말을 듣고 굶주린 지역에 곡식을 옮겨 이익을 보려는 자를 엄단하라고 하였다.
 
“함길도 사람으로 벼슬하는 사람이 농장(農庄)에서 나는 미곡으로 그 도(道)에 바치고 경기 각 고을에서 미곡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잠정적으로 그 소원대로 허락하되, 그리 하므로 이익을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일체 금지하라.” - 세종 4년 11월 21일
 
교대해야 할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에게 좀 더 머물기를 권하였다.
 
“경이 변진(邊鎭)에 간 것이 거의 두 돌이 되었으니, 당연히 교대하여야 하나, 장수의 적임자를 얻기란 진실로 어려운 것이다. 또 지금 북쪽 국경에 사변이 있으니, 경을 더 진(鎭)에 머물러 있게 하여 변방의 안정을 기대하려 하니,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라.” 하였다. - 세종 6년 12월 9일
 
경원의 읍(邑)을 용성으로 옮기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세종은 단호하였다.
 
최윤덕도 역시 계하기를 “이 지방의 형세를 신이 갖추 아오니 용성으로 옮기는 것이 비록 〈국경에서〉 물러나는 것이나, 그 사이가 심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오니 옮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일 경원이 적에게 패하는 바가 되면 비록 후회한들 따를 수 있사오리까. 지난 경인년에 곽승우(郭承祐)의 일은 족히 거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의정부와 육조는 일찍 그 고을에 임명되었던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어라. 그러나 나의 뜻으로 말하면 물러나오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 세종 7년 11월 14일 
 
임금이 모화루(慕華樓)에 행차하던 날, 병조판서 최윤덕과 참의 민의생이 오만하고 방약무인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걸었으므로 죄를 주어야 한다고 사헌부가 아뢰었다.
 
“의생의 평상시 동정은 의기가 당당하여 다른 사람과 같지 않는데, 그의 천성이 그러하며, 판서도 또한 그럴진대 마침 의생과 더불어 공사를 의논했다 하니, 어찌 죄를 주겠느냐.” - 세종 10년 10월 14일
 
최윤덕의 건의가 세종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면전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최윤덕이 아뢰기를 “근래에 방패(防牌) 60여 명을 인도하여 영선하고 있으나 휴식할 겨를이 없사온데, 이제 사정전과 경회루와 태평관 등의 역사를 한꺼번에 모두 시작하게 된다면, 백성들이 힘이 매우 곤핍하여질 것이오니, 태평관의 역사는 일단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윤덕이 나가니, 임금이 대언들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농사가 비록 풍작을 보았다 하나, 백성들이 아직 소복(蘇復)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방패 60명은 제하고, 오로지 승도들만을 모집하여 태평관을 짓게 하면, 비록 장마 전에 마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겨울에 끝낼 수만 있으면 가하다. 사정전은 협착하고, 경회루는 기울어져 위태하기 때문에 부득이 개수하는 것이다.” 하였다. - 세종 11년 1월 20일 
 
사헌부에서 양전사업, 사신접대, 밭작물 부실, 쌀값폭등을 이유로 성보 기지의 시찰을 위해 최윤덕을 충청도에 파견하는 것이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세종은 흔들리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윤덕이 갈 것을 말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고, 대신도 또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큰 일을 성취하려면 남의 말을 다 따를 수는 없는 것으로 안다. 성보를 수축하는 일을 이미 윤덕에게 위임하였은즉, 윤덕이 진달하는 것은 내 반드시 이를 따를 것이다. 윤덕도 역시 민폐(民弊)를 모르는 자가 아니며, 큰 공을 성취하려는 데 어찌 사소한 폐단을 헤아리겠느냐.” 하였다. - 세종 12년 9월 1일
 
세종이 김종서에게 최윤덕의 사람 됨됨이를 물었다.
 
임금이 좌대언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경이 최윤덕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람됨이 비록 학문의 실력은 없으나 마음가짐이 정직하고 또한 뚜렷한 잘못이 없으며, 용무(用武)의 재략(才略)은 특이합니다.” 고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곧고 착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근신(謹愼)하여 직무를 봉행(奉行)하므로 태종께서도 인재라고 생각하시어 정부(政府)에 시용(試用)하였노라. 전조(前朝)와 국초(國初)에 간혹 무신(武臣)으로서 정승을 삼은 이가 있으나, 어찌 그 모두가 윤덕보다 훌륭한 자이겠는가. 그는 비록 수상(首相)이 되더라도 또한 좋을 것이다. 다만 말이 절실하지 못한 것이 많다. 하윤(河崙)이 정승이 되어 모든 정무(政務)를 처리할 때에, 조영무(趙英武)가 거기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일이 없었다. 만약 한 사람의 훌륭한 정승을 얻으면 나라 일은 아무 걱정없이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세종 14년 6월 9일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파저강의 토벌에 관해 전승보고를 올렸다.
 
최윤덕이 박호문을 보내어 치계(馳啓)하기를 “본도의 마병(馬兵)·보병의 정군(正軍) 1만을 발하고, 겸하여 황해도 군마(軍馬) 5천을 거느리고 4월 초10일에 일제히 강계부에 모여서 군사를 나누었고 (중략) 본월 19일에 여러 장수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을 마쳤습니다. (중략) 포로 236명, 사살 183명, 전사 4명, 부상 25명입니다.” 하였다. - 세종 15년 5월 7일
 
근정전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출정한 장수들을 위로하였는데 최윤덕으로 하여금 세자가 따르는 술을 앉아서 받게 하는 파격적 대우를 하였다.
 
(중략) 임금이 친히 술잔을 잡아 윤덕·순몽·효성·징석·사석 등에게 주고, 또 세자로 하여금 윤덕 등의 앞에 나아가서 술잔을 돌리게 하고, 인해 윤덕에게 명하여 일어나서 술을 받지 말게 하였다. 군관(軍官)에게 명하여 마주 대하여 일어나서 춤을 추게 하니, 윤덕도 술이 취하여 일어나 춤을 추고 임금에게 술잔을 드렸다. - 세종 15년 5월 26일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읜 최윤덕은 이웃동네 양수척의 집에서 자랐는데 어느날 목우산에 나타난 호랑이를 화살하나로 쏘아죽인 일이 있을 정도로 무재(武才)가 뛰어났다.
 
최윤덕은 성품이 순진하고 솔직하며, 간소하고 평이하며, 용략이 많아서 일시(一時)의 명장(名將)이 되었다. 그 아우 최윤복·최윤온·최윤례를 혼인시키기 전에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자기 집에 모아 길러서 모두 혼수를 마련하여 혼인하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밀어 주었다. - <최윤덕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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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25 [11:0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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