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 세종이야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귀화인의 처우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8/02/08 [12:40]
세종은 귀화한 왜인들을 우리나라 백성으로 여겨서 우대하여 관리하였다.
 
“여러 섬의 왜적들이 기근으로 매년 양식을 구걸할 때면 곧 급여하기도 하였고, 또 우리의 변읍(邊邑)에서 장사할 것도 허락하였으니, 그들이 살게 된 것은 전혀 우리나라의 은덕이거늘, 이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변민들을 침략하여도 모른 체 하였고, 이제 도리어 군사를 일으켜, 우리 충청도 도두음곶이를 침략하여, 우리 인민들을 죽이고 병선을 불살랐으며, 또 우리 황해도 해주 지경에 와서 도적질까지 하였다.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한 왜인들은 곧 우리나라의 백성이라. 그 이름을 따로 밝혀 등록하게 하고, 각 포구의 병선에 분배하되, 집마다 세금을 면제하고, 그 이름을 적어서 알릴 것이며, 이중에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을 후히 줄 것이다.” 하였다. - 세종 1년 5월 15일
 
대마도의 왜인들이 살기가 어려워 귀화하기를 원하니 받아들였다.
 
예조에서 경상도 감사의 관문(關文)에 의하여 계하기를 “대마도의 왜인 변삼보라(邊三甫羅)와 만시라(萬時羅) 등이 배 한 척에 같이 타고 이달 12일에 해운포(海運浦)에 이르러 말하기를, ‘본도(本島)에는, 전지(田地)는 적은데 부세(賦稅)는 과중하여 생계가 매우 어렵습니다. 조선에는 인정(仁政)을 시행한다는 말을 듣고, 성덕(盛德)을 우러러 사모하여 귀화해서 직업을 얻어 편안히 살고자 한다.’라고 하면서 각기 처자(妻子) 남녀 모두 24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습니다.”하니 명하여 늙은이와 어린이와 부인들에게 양식을 주어 편안히 머물게 하고, 장정은 서울로 올려 보내게 하였다. - 세종 5년 2월 21일
 
해운포에 들어온 왜인들을 전라도에 정착시켜 양식을 주고 조세와 요역을 면하게 하였다.
 
호조에 전지를 내리기를 “전라도에 안치(安置)된 왜인 24명이 농업을 하기 전까지 양식을 주라.”하고 병조에 전지하기를 “지금 전라도에 안치된 왜인들에게 전조(田租)는 3년까지, 요역(徭役)은 10년까지 면제해 주라.”고 하였다. - 세종 5년 3월 25일
 
귀화한 여진인에게도 집을 주었다.
 
귀화한 사람 호군(護軍) 동말소(童末所), 마변자(馬邊者)와 사정(司正) 김소응거(金所應巨) 등에게 집을 주라고 명하였다. - 세종 5년 12월 21일
 
중국인 장청의 일행에게 살림살이와 전토 및 노비를 주고 양가집 딸과 결혼을 시켰다.
 
중국사람 장청(張淸)을 전라도 전주에 살게 하고, 또 같이 온 중국사람 남녀 11명을 충청·전라도에 나누어 두고, 청에게는 안장 갖춘 말과 옷과 이불과 노비 각각 3명을 내려 주고, 그 고을에 명하여 양가(良家)의 처녀를 가려서 장가들게 하고 전장(田庄)과 살림 도구를 넉넉히 주어 그들로 하여금 주학(州學)에 나가 글을 읽게 하고 또 생도(生徒) 8, 9명은 통역할 말을 전습하도록 하였다. 청이 떠날 때에, 통곡하면서 가려고 하지 아니하며 예조좌랑 김진(金塡)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온 것은 본시 몸만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니, 비록 귀국에서 천금을 준다 하여도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어느 날인들 그치겠는가.”하면서, 진의 옷을 잡고 흐느끼면서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진이 본조에서 후대한다고 개유(開諭)하기를 오랫동안 거듭한 뒤에 재촉하여 떠나게 하였다. - 세종 6년 2월 13일
 
고향인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음에 통곡하던 장청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서 일까. 3개월 만에 세종이 다시 장청의 귀국문제를 거론하였다.
 
임금이 영의정과 좌의정 등을 불러서 말하기를 “지난번에 중국사람 장청을 조정 논의에 따라 전주에 우거하게 하였으나, 내 마음에 몹시 미안했소. 경들은 깊이 생각하여서 말을 하오. 전번에 〈장청에게〉 관직을 주어서 사대문서(事大文書)를 맡게 하라는 자가 있었소. 그러나 이 사람이 특별한 재능이 없고, 가령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 사람의 힘을 입어서 사명(詞命)을 닦겠소. 우리나라는 그전부터 왜에 포로되었던 중국사람이 오면 모두 중국에 돌려보냈는데, 그 중에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통하는 것을 자세하게 아는 자가 어찌 없었겠소마는, 〈중국에서〉 그냥 두고 논란하지 않았거든, 유독 장청 등을 본국에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50보(步)로서 백보를 비웃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다만 〈이 일을 시일이〉 늦도록 주문(奏聞)하지 않았음이 염려되오.” 하였다. - 세종 6년 5월 12일
 
포로되었던 중국인 장청·곽천보 등에게 각각 옷 한 벌, 갓·신·버선을 하사하였다. - 세종 6년 6월 4일
 
중국인 장청 등 남녀 14명을 요동으로 보내어 놓아주었다. - 세종 6년 6월 6일
 
세종의 이런 자상한 마음씨는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우리 백성들이 일본에서 대접을 받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으로 보답을 받았다.
 
무릉도(茂陵島)에 들어갈 때 바람에 표류하였던 수군(水軍)인 평해(平海) 사람 장을부(張乙夫) 등이 일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처음에 수군 46인이 한 배에 타고 안무사 김인우(金麟雨)를 수행하여 무릉도를 향해 갔다가, 갑자기 태풍이 일어나 배가 부서지면서 같은 배에 탔던 36인은 다 익사하고, 우리들 10인은 작은 배에 옮겨 타서 표류하여 일본국 석견주(石見州)의 장빈(長濱)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순도로가 우리들의 옷을 보고 말하기를, ‘조선 사람이로구나.’하고 두세 번 한숨지어 한탄하고, 양식과 웃옷과 바지를 주었습니다. 30일 동안을 머물렀는데, 날마다 하루 세 번씩 음식 대접을 하였으며, 떠날 때에는 큰 잔치를 베풀고 잔을 들어 친히 권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을 후하게 위로하는 것은 곧 조선의 전하(殿下)를 위하기 때문이다.’고 하고, 여행 중의 양식 1백 석을 주고, 사람 20인을 보내어 호송하였습니다.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서 또한 1개월을 머물렀는데, 도만호(都萬戶)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세 번 연회를 열어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를 존경하여 이렇게 할 뿐이다.’고 하였고, 또한 사람을 보내어 호송하여 주었습니다.” 하였다. - 세종 7년 12월 28일
 
귀화인에 대한 차별적 행동을 엄하게 꾸짖고는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라하였다.
 
사헌부에서 판내시부사 김용기(金龍奇)가 중추원부사 은아리(殷阿里)에게 실례를 했다하여 논죄하니 임금이 용서하였다. 처음에 용기가 조회를 들어가는 재상과 대간들에게 아침식사를 드렸다. 은아리는 여진사람으로 불학무식하여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리가 식사 중에 기름진 고기를 먹으면서 술은 주어도 마시지 아니하므로, 용기가 농담하기를 “그대는 가짜 달단(韃靼)이다. 달단은 기름진 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술을 마시는데, 그대는 기름진 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지 아니하니, 참말 가짜 달단이다.” 하였다. (중략) 임금이 승정원에 명령하여 용기를 꾸짖기를 “네가 대신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니 법으로 마땅히 죄주어야 할 것이로되, 우선 용서하는 것이니 뒤에는 그러지 말라.” 하였다. - 세종 15년 윤8월 18일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8/02/08 [12:40]  최종편집: ⓒ 세종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가을이 익어가는 들녘
가장 많이 읽은 기사
18일 여주지역 택시 운행 중단… 카카오 카풀 사업에 택시업계 반발 / 세종신문
백종덕 변호사 여주에 사무실 개소 / 세종신문
남한강로타리클럽, 사무실 이전 현판식 진행 / 세종신문
원경희 전 시장, GK1 재단 설립… “세종과 한글 세계에 알리겠다” / 세종신문
‘농민기본소득제’, 여주지역 첫 공론화 장 열려 / 세종신문
여주시, 쌀생산농업인 소득지원금 지원 / 세종신문
가정리 대책위-제7군단, ‘전차훈련 주둔지’ 협상 시작 / 세종신문
[신철희 정치칼럼] 보수와 진보, 또는 좌파와 우파란 무엇인가? / 세종신문
강변칠우 사건의 발원지 ‘양화나루’ / 세종신문
북카페 세렌디피티78에서 재즈의 향연을… 여주대 실용음악과 교수들 공연 / 세종신문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