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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朴堧)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8/02/22 [10:43]
박연(朴堧, 1378~458) 본관은 밀양.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문헌(文獻).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악학제조가 되었다. 악서편찬, 율관과 악기제작, 아악의 제정 등에 업적을 남겼으며 왕산악·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석경과 황종은 음의 기준이 되었기에 악기를 조율할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악학별좌 봉상판관 박연이 1틀에 12개 달린 석경(石磬)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처음에 중국의 황종(黃鍾)의 경쇠로써 위주하였는데, 삼분(三分)으로 덜고 더하여 12율관(律管)을 만들고, 겸하여 옹진(甕津)에서 생산되는 검은 기장으로 교정(校正)하고 남양(南陽)에서 나는 돌을 가지고 만들어 보니, 소리와 가락이 잘 조화되는지라, 그것으로 종묘와 조회 때의 음악을 삼은 것이다. - 세종 9년 5월 15일
 
음악에 관한 한 박연의 실력이 뛰어났기에 세종의 믿는 바가 매우 컸다. 
 
임금이 말하기를 “거서(秬黍)로써 율관(律管)을 고쳐 만드는 것은 비록 박연일지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황종(黃鍾)을 본떠서 만든다면 비록 거서가 아니더라도 될 것이다. 중국의 황종과 박연이 만든 율관의 소리를 살펴본다면 그것이 조화되고 조화되지 않음을 알 것이다.” 하니, 신상이 아뢰기를 “박연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고 영악학(領樂學) 맹사성이 이를 도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악기(樂器)는 박연에게 맡긴다면 성음(聲音)의 절주(節奏)는 거의 될 것이다.” 하였다. - 세종 9년 9월 4일
 
한 가지 일을 잘하면 그가 하는 다른 일도 잘하는 듯 보이게 마련이다.
 
대언이 계사(啓事)한 것에 대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박연(朴堧)은 세상 일에 통하지 아니한 학자가 아니라 세상 일에 통달한 학자라 할 수 있다.” 하였다. - 세종 10년 2월 20일
 
박연이 아프다는 소식에 세종은 근심이 앞섰다. 빠르게 후계자를 물색하였다.
 
임금이 대언(代言)들에게 이르기를 “봉상소윤(奉常少尹) 박연이 건의하여 아악(雅樂)을 쓰고 향악(鄕樂)을 쓰지 말자고 청하므로, 내가 그 말을 가상히 여겨 이를 수정(修正)하라 명하였더니, 박연이 오로지 이에 마음을 쓰고 힘을 기울이다가 이제 마침 병에 걸렸으니, 장차 연의 뒤를 이을 만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별좌(別坐) 정양(鄭穰)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지신사 허성(許誠)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정양도 역시 서생(書生)이온데 매우 음률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비록 박연에게 미치지 못하오나 정교(精巧)한 점은 박연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의 묘리를 자세히 전수케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세종 12년 7월 28일
 
박연은 줄기차게 악기를 개량하여 법제에 맞도록 노력하였다.
 
사정전(思政殿)으로 거둥하여 아악(雅樂)과 사청성(四淸聲)을 감상하였다. 이는 박연(朴堧)이 새로 만든 종(鐘) · 경(磬)들이었다. - 세종 12년 8월 18일 
 
음악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세종은 음악 책임자인 박연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었다.
 
임금이 음악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르기를 “박연이 조회(朝會)의 음악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바르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율려신서(律呂新書)도 형식만 갖추어 놓은 것뿐이다.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세종 12년 12월 7일
 
해박한 음악지식을 바탕으로 세종과 박연의 대화엔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대호군 박연에게 명하기를 “내가 몸이 불편하여 칙서를 직접 맞이할 수 없어서 세자로 하여금 맞이하게 하였은즉, 음악은 황종궁(黃鍾宮)을 쓰는 것이 불가하지 않을까. 고선궁(姑洗宮)을 씀이 어떠할까.” 하니, 박연이 “하교가 당연하시옵니다.” 라고 아뢰었다. - 세종 13년 8월 17일
 
세종의 의도와 박연의 생각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임금이 상호군 박연에게 이르기를 “문(文)과 무(武) 두 가지 춤의 가사(歌詞) 1장(章)으로는 그 가운데에 태조·태종의 공덕(功德)을 다 찬송하기에 미진(未盡)함이 있으니, 다시 1장을 더함이 어떠할까.” 하니, 박연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마련(磨鍊)하여 아뢰라.” 하니, 박연이 아뢰기를 “1장 가운데에 태조·태종의 공덕을 겸하여 기림은 미흡하오니, 원컨대 각각 공덕을 따로 1장씩 찬송하여 모두 2장의 가사를 만들어 각각 8박자(拍子)로 하고, 춤을 출 때에 제 1변(變)은 태조를 기리고, 제 2변은 태종을 기리어 서로 차례대로 송덕(頌德)하고, 제 6변에 이르러 태종에서 끝마치되, 악이 끝나면 물러가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14년 10월 18일
 
임금이 근정전에서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는데,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지신사 정흠지 등이 박연에게 묻기를 “모양의 제도와 성음의 법을 어디에서 취했는가.”하니, 연이 말하기를 “모양 제도는 한결같이 중국에서 내려 준 편경에 의하였고, 성음은 신이 스스로 12율관을 만들매 합하여 이루었다.”고 하니, 여러 대언들이 연에게 말하기를 “중국의 음을 버리고 스스로 율관을 만드는 것이 옳겠는가.” 하며, 모두 거짓말이라 여기니, 연이 글을 갖추어 아뢰기를 “지금 만든 편경은 모양의 제도는 한결같이 중국 것에 의하였으나, 성음은 (중략) 마땅히 높을 것이 도리어 낮고, 마땅히 낮을 것이 도리어 높으니, 한 시대에 제작한 악기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만약 이것에 의하여 제작하면 결코 화하여 합할 이치가 없기 때문에, 삼가 중국 황종의 소리에 의하여 황종의 관을 만들고, 인하여 손익(損益)하여 12율관을 이룩하여 불어서 음률에 맞추어, 이에 근거하여 만들었습니다.” - 세종 15년 1월 1일
 
논란이 분분하자 세종이 망설임 없이 박연의 편에 섰다. 
 
“중국의 경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을 만들어 음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고, 물러가서 이를 갈아 먹이 다 없어지자 소리가 곧 바르게 되었다. - 세종 1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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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2/22 [10:43]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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