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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孟思誠)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8/04/19 [11:00]
맹사성(孟思誠, 1360~1438). 본관은 신창. 호는 고불(古佛). 시호는 문정(文貞). 13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을 지냈다.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최영장군의 손서(孫壻)였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세종과 맹사성의 만남은 칭찬으로 시작되었다.  
 
맹사성에게 말하기를 “경이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가 되어 영인(伶人)에게 새로 지은 사곡(詞曲)을 가르쳐서 율조에 합하게 하였으므로, 부왕께서 기뻐하셨다.”고 하면서, 내구(內廐)의 말 한 필을 내려 주었다. - 세종 즉위년 11월 10일
 
세종이 교서를 내려 신하들의 진언을 구하고,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와 육조에서 시행할 만한  16개 조목들을 가려 뽑아 아뢰었는데 맹사성의 의견도 그대로 반영하였다.
 
이조판서 맹사성 등이 말하기를 “지금 환상을 꾸어 쓰고 갚지 못하는 것과 또 죽은 사람의 몫을 그의 일가들에게 물려받고 있사옵니다. 대체 나라에서 가난한 백성에게 식량을 빌려 주는 법을 설치한 것은 백성을 위한 것으로 비록 그가 빌어 쓴 것이 거듭 밀려서 갚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만일 굶주림을 당한다면, 감히 걷어 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구제하기를 서둘러야 할 터인데, 하물며 못 갚고 달아났다든가, 죽은 사람이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옛적에 흉년이 들면 토지의 세를 감해 주었사오니, 지금부터 관가의 양곡을 빌러 쓰고 갚지 못하고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에 대하여 그 일가에게 물려받지 말아서, 관대하고 사랑하는 은전을 베푸시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2년 윤1월 29일
 
세종은 맹사성을 늘 곁에 두고 싶어 하였다.
 
이조판서 맹사성이 부친의 병으로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역마를 내어 약을 내려 보냈다. 이 때 사성의 부친 맹희도(孟希道)는 충청도 온수현(溫水縣)에 살았다. - 세종 3년 2월 5일
 
남편의 부임지에 처자가 사노비를 데리고 따라가는 것이 부당하다고 맹사성이 아뢰었다. 그러나 실상은 인륜에 관계된 일이었음을 세종이 설명하였다.
 
이조 판서 맹사성이 계하기를 “어제 내리신 명령에, 지해풍군사와 죽산현감의 처자에게 그 자원(自願)에 따라 사복(私僕)을 거느리고 부임하는데 따라가도록 허용하였는데, 이 일은 박은이 일찍이 본조로 하여금 계달케 한 것인데 신 등은 이로 인하여 폐해가 생길까 염려되었으나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한 것과 같이 이로 인하여 폐해가 생긴다는 것은, 내가 어제 이미 이를 말하였다. 이 두 수령의 가속은 임시로 자원에 따라 내려 보내게 하였지마는, 그러나 이 법이 이미 정해졌으니, 다만 이로 인하여 폐해가 생길 뿐만 아니라 혹시 모두 사복을 거느리고 부임하는 데 따라간다면, 사류(士類)를 권려(勸勵)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그 수령의 처자가 농사철에 자원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계달하지 못할 것이나, 어버이가 병이 있는데, 아들이 가서 보고, 남편이 병이 있는데, 아내가 가서 보는 것은 인륜의 큰 것이니,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세종 3년 5월 21일
 
맹사성은 작지만 국정에 꼭 필요한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내었다.
 
시호(諡號) 제정을 봉상시의 관리 한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다. - 세종 10년 윤4월 22일
 
수범(首犯)이 감면·원면되면 종범도 또한 감등·원면하는 것을 입법하다. - 세종 10년 윤4월 23일
 
세종은 세자비 간택에 관심이 깊었다. 맹사성이 세종의 간택방식에 찬성하였다.
 
임금이 또 지신사 정흠지에게 이르기를 “이제 동궁을 위하여 배필을 간택할 때에는 마땅히 처녀를 잘 뽑아야 하겠다. 세계(世系)와 부덕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할 것이다. 나는 부모된 마음에서 친히 간택하고자 하나, 옛 예법에 없어서 실행할 수가 없으므로, 창덕궁에 모이게 하고 내관으로 하여금 시녀와 효령대군과 더불어 뽑게 해야겠는데 어떻겠는가.”하니, 황희·맹사성·변계량·신상·윤회 등은 모두 “좋습니다.”하였으나, 허조만 유독 “불가하옵니다. 만약에 한 곳에 모이게 하여 가려 뽑는다면 오로지 얼굴 모양만을 취하고 덕을 보고 뽑지 않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잠깐 본 나머지 어찌 곧 그 덕을 알 수 있으리오. 이미 덕으로서 뽑을 수 없다면 또한 용모로서 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처녀의 집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좋다고 생각되는 자를 예선(豫選)해서 다시 창덕궁에 모아 놓고 뽑는 것이 좋겠다.”하니, 모두가 “좋습니다.”하였다. - 세종 11년 8월 4일
 
세종은 나이 든 맹사성의 건강을 배려하였다.
 
“강무(講武)할 때에 의정부에서 관례에 의하여 반드시 거가(車駕)를 수종해 왔다. 그러나 지금 우의정 맹사성은 나이 70이 넘었고, 찬성 허조는 몸에 풍질(風疾)이 있은즉, 혹 의논할 일이 있다면 어찌 참찬 이하의 관원만으로 능히 이를 결단하겠는가. 의정부는 거가를 따르지 말도록 하라.” - 세종 13년 1월 9일
 
예조에 전지하기를 “우의정 맹사성·이조판서 권진·찬성 허조 등은 조계(朝啓)를 정지하는 날만은 예궐(詣闕)하지 말게 하라.” 하니, 맹사성 등이 연로(年老)하기 때문이었다. - 세종 13년 1월 21일
 
우리 음악인 향악에 관해 세종과 맹사성의 의견이 일치하였다.
 
임금이 맹사성에게 이르기를 “(중략) 중국의 풍류를 쓰고자 하여 향악(鄕樂)을 다 버리는 것은 단연코 불가하다.” 하니, 사성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과연 그러하옵니다. 어찌 향악을 모두 버릴 수야 있겠습니까. 먼저 아악을 연주하고 향악을 겸해 쓰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 세종 13년 8월 2일
 
세자가 활달하지 못하니 활을 쏘아서 기력과 체질을 길러 주어야겠다고 세종이 신하들에게 생각을 전하였다. 황희는 반대하였고 맹사성은 찬성하였다.
 
맹사성은 아뢰기를 “성상의 말씀이 진실로 옳습니다. 지난 번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자는 순수하고 질박하여 마치 부인(婦人)과 같다.’고 하셨사온즉, 궁중에서 활 쏘게 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여겨지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이미 그런 줄로 아노라.” 하였다. - 세종 14년 10월 25일
 
창녕부원군 성석린(成石璘)이 선배가 되지만 맹사성의 집 앞을 가고 올 때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석린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고 졸기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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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4/19 [11:00]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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