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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관계가 복잡했던 양녕대군
‘대왕 세종’ 바로 보기 [3]
 
조성문   기사입력  2008/01/24 [10:48]
동생인 민무구와 민무질이 협유집권(挾幼執權)의 혐의로 고문을 받아 죽을지도 모를 위기에 이르자 원경왕후가 태종 면전에서 강하게 반발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평범한 부부관계를 넘어선 동지적 관계였다. 소위 1차·2차 왕자의 난과 태종의 왕위계승에 이르기까지 숨막히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태종에게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이가 바로 원경왕후였기 때문이다.
 
평소 궁녀들을 가까이하는 태종에게 서운함을 느껴오던 원경왕후는 태종이 성균악정 권홍(權弘)의 딸을 별궁으로 맞이하려 하자 감정이 폭발하였다. 이때의 일이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임금이 권씨가 현행이 있다하여 예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왕후가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嘉禮色; 왕 또는 왕세자의 혼인 등을 준비하는 벼슬)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과 시녀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에 맞아들였다. 왕후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하였다.”

효빈(孝嬪) 김씨는 태종의 첫 번째 후궁이다. 덕실이란 이름의 이 여인은 원래 태종의 새 어머니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시녀였다. 김씨의 미모에 반한 태종이 정안군(靖安君) 시절에 그녀를 유혹해 뱃속에 아이를 갖게 하였다.
 
정안군을 미워했던 신덕왕후는 이를 기회로 태조에게 정안군의 죄를 물을 것을 청하고 김씨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 사실 안 정안군이 다급하게 부인인 원경왕후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한달음에 궁궐로 달려간 원경왕후는 지아비를 유혹한 김씨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침을 뱉으며 펄펄 뛰었다. 그러자 신덕왕후는 자신보다 더 분개하는 며느리에게 김씨의 처분을 맡겼다. 원경왕후의 꾀에 넘어간 것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덕실이가 태종의 첫 번째 서자인 경녕군(敬寧君) 이비(李?)를 낳았고 왕비 다음 자리인 빈(嬪)이 되었다. 모두가 원경왕후의 덕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경녕군을 낳을 때 원경왕후의 질투로 인해 홀대를 받았다고는 하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자 몸종으로서 섬기던 주인인 원경왕후를 상대로 하여, 효빈 김씨가 극중에서처럼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아버지 태종의 마음에 쏙 드는 아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1404년에 왕세자가 되었다가 1418년에 폐세자가 된 원인을 놓고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양녕이 애초부터 임금되기 틀려먹은 방탕아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녕이 처음에는 열심히 군왕의 도리를 닦았으나 아버지의 마음이 셋째인 충녕에게 기우는 것을 보고 거짓으로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세자 폐위의 한 원인이 되었던 양녕의 여자관계는 상당히 복잡하였다.
 
실록에 등장하는 양녕의 첫 번째 연인은 봉지련(鳳池蓮)이다. 봉지련은 중국 사신 환영연에 참석했던 기생이다. 1410년(태종 10). 세자가 봉지련을 궁중에 불러들였다가 임금에게 들키자 근심걱정으로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두 번째가 평양기생 소앵(小?)이다. 1413년. 매일 밤 동궁 담장 밑으로 몰래 드나들며 세자와 정을 통하던 소앵은 평양으로 쫒겨났다. 세 번째가 초궁장(楚宮粧)이다. 양녕은 매제(妹弟)인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의 집에서 처음 초궁장을 만났다. 1415년. 기생 초궁장을 내쫒았다. 세자가 사사로이 초궁장을 가까이 하므로 임금이 알고 내쫒은 것이었다. 상왕(上王 ; 정종)이 일찍이 이 기생을 가까이 하였는데 세자가 이를 알지 못하고 사통하였기 때문이었다.
 
네 번째가 칠점생(七點生)이다. 1416년. 인덕궁(仁德宮)에서 상왕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연회가 파하자 세자가 이백강이 데리고 있던 기생 칠점생을 데리고 돌아오려 하였다. 이때 충녕대군이 “친척 간에 서로 이같이 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하며 강력히 만류하였고 이 일로 형제사이가 서먹서먹해졌다.
 
다섯 번째가 어리(於里)다. 어리는 곽선(郭璇)의 첩이었다. 1417년. 재색을 겸비했다는 소문에 세자가 사람을 시켜 파주(坡州)에 있던 어리를 불러 올렸다. 어리는 동궁전에 머물면서 세자의 아이까지 낳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양녕은 폐위되어 광주(廣州)로 쫒겨나고 만다. 태종은 양녕을 내보내면서 목이 메도록 통곡하였다. 지우고 싶었던 자신의 치부(여자문제)를 아들 양녕에게서 보았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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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1/24 [10:48]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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