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 세종이야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정인지(鄭麟趾)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8/05/02 [12:43]
정인지(鄭麟趾, 1396~1478). 본관은 하동. 호는 학역재(學易齋). 시호는 문성(文成). 141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공법(貢法)의 실시를 극력 주장하였으며 음악과 천문사업에도 관여하였다. 1446년 훈민정음 창제에 협조하였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을 지었다. 
 
정인지는 태종이 직접 장원으로 뽑은 사람이다.   
 
임금이 직접 문과 급제에 정인지를 1등으로 뽑다. - 태종 14년 3월 11일
 
병조좌랑 정인지가 옥에 갇혔다. 세종의 왕위계승을 승인하는 명나라의 고명사신을 맞이하는 의식에서 황색의장을 빼놓은 까닭이다. 결국은 벌을 받고 복귀하였다.
 
선지(宣旨)하기를 “병조 좌랑 정인지에게 태장(笞杖) 40대를 때려 속죄하고, 도로 본직(本職)에 나가게 하라.”고 하였다. - 세종 1년 2월 1일
 
정인지는 10년 마다 열리는 중시(重試)에서 다시 장원으로 급제하는 영예를 누렸다.
 
문과의 중시에 직집현전 정인지 등 12인을 뽑고, 초시에 생원 남계영(南季瑛) 등 20인을 뽑았다. - 세종 9년 3월 19일 
 
세종이 국학(國學)에서 유생을 뽑는 방법을 논의하였다. 국학은 성균관을 말한다.
 
임금이 시강관 등에게 이르기를 “유생들이 모두 초집(抄集)을 모방하여 제술(製述)한 까닭으로 지금 시학(視學)하여 뽑은 가작(佳作)이 드물었다. 내가 일찍이 자주 시학하여 취사(取士)하고자 하였으나, 이후부터는 다시 시행하지 않겠다. 만약에 사람을 뽑고자 한다면 장차 무슨 방법으로 시험보게 할 것인가.” 하니, 좌대언 허성(許誠)·부제학 정인지 등이 대답하기를 “불시에 국학에 행차하시와 혹은 경서를 강(講)하기도 하고, 혹은 제술하기도 하여 시험해 뽑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오경의(五經疑)로 출제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정인지가 아뢰기를 “어려운 출제입니다.” 하였다. - 세종 11년 5월 29일
 
말미에 정인지가 한 말은 ‘출제난의(出題難矣)’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출제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였다. 이대로라면 발칙하게 들린다. 성균관의 교과내용 중에 제술이 있는데 제술에는 사서의(四書疑), 오경의(五經疑), 시(詩), 부(賦), 송(頌), 책(策)이 있다. 사서의와 오경의는 사서와 오경을 보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며, 시, 부, 송은 정해진 형식에 따라 문장을 짓는 것이고, 책은 현실 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종이 오경의로 출제하겠다고 하자 정인지가 난이도가 높다고 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싶다.
 
정인지와 정양에게 자세히 살펴서 주척(周尺)을 바로잡도록 명하였다.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와 봉례 정양(鄭穰)에게 명하여 집현전에서 주척을 상고하여 이를 바로잡게 하고, 인하여 악보를 지으라고 명하였으니, 임금이 율려신서(律呂新書)와 여러 악서를 보고 그 제작의 묘(妙)를 알았으므로 이를 지으라 명한 것이었다. - 세종 12년 9월 29일
 
경연에서 송나라 태조의 인재 등용에 대해 얘기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태조(宋太祖)가 인재를 등용한 방법은 훌륭하였다. 그러나 많이 등용하면 우수한 사람만을 뽑아 쓴 것이 못될 것이니, 이것은 은혜를 베풀어 특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니, 시강관 정인지가 대답하기를 “태조가 인재를 뽑아 쓴 것은 사실상 훌륭한 점이 있사오니 비록 많은 사람을 등용하였다 할지라도 각기 한 가지씩의 특장이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천하의 인재를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 세종 12년 11월 14일
 
세종과 정인지가 송나라 태종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가서, 자치통감속편(資治通鑑續篇)을 강의하다가 “큰 잔치를 사흘 동안 베풀었다[賜大酺三日].”는 대목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송 태종은 정말 어진 임금이다. 그러나 더러는 공치사도 하고 또 희롱을 좋아하였으니, 이런 것은 제왕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하니, 정인지가 대답하기를 “널리 알기를 힘썼고 시를 짓기를 좋아한 것도 제왕으로서의 학문은 아니었습니다. 고기 낚는 것을 좋아하여 4품 이상은 모두 들어와서 참관하게까지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간한 사람은 없었는가. 만일 간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의 넓은 아량으로 어찌 받아들이지 않았으랴.” 하니, 대답하기를 “간한 사람은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다만 그 당시의 사람이 시를 짓기를 ‘꾀꼬리는 임금의 수레에 놀라서 꽃 속으로 숨어 들고, 물고기는 임금의 얼굴을 무서워하여 낚시에 걸리기가 어렵도다.’고 한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잘 짓는 사람이로다. 규풍(規諷)의 이치를 비유한 그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정위(丁謂)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위(謂)가 비록 시는 잘 지었으나 그의 마음씨는 바르지 못하였다.” 하였다. - 세종 12년 11월 18일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가 세종시대의 찬란한 업적에 빛을 더하였다.
 
아악보(雅樂譜)가 완성되었다. 정인지가 명령을 받들어 서문을 지었다. - 세종 12년 윤12월 1일
 
치평요람(治平要覽)이 이루어졌다. 정인지 등이 전문(箋文)을 올리기를 “편찬한 치평요람 1백 50권을 삼가 다듬어 쓰고 제본하여 완질로 만들어 전문과 함께 올리나이다.” 하였다. - 세종 27년 3월 30일
 
정인지 등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권을 올렸다. 전(箋)에 이르기를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 1백 25장(章)이온데, 삼가 쓰고 장황(裝潢)하여 전을 아뢰옵니다.” 하였다. - 세종 27년 4월 5일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예조판서 정인지의 서문에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중략)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중략)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중략)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하였다. - 세종 28년 9월 29일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8/05/02 [12:43]  최종편집: ⓒ 세종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부처님 오신 날… 진지한 표정의 동자승들
광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여주세종대왕마라톤대회, 2천5백여명 남한강변을 달리다 / 세종신문
원경희 선거캠프, 김선교 양평군수 공직선거법 위반 고발 / 세종신문
“여주쌀 가공식품 협동조합 하고 싶다” / 세종신문
신륵사,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회 열어 / 세종신문
민주당 이항진 시장 예비후보, 선거사무실 개소식 진행 / 세종신문
참외와 함께 즐기는 달콤아삭한 봄, 여주금사참외축제로 오세요~ / 세종신문
여주서 경기도지사기 족구대회 열려… 여주족구팀 2부 종합 5위 / 세종신문
언론사 대표-전 예비후보자, 기사 대가 금품수수… 여주선관위, 검찰에 고발 / 세종신문
이항진 여주시장 후보, 민주당 출정식 참석해 결의 다져 / 세종신문
여주 선거판은 ‘무관심’, ‘무정책’, ‘무원칙’ / 세종신문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