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 인터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조국이 있어야 내가 있다”
[인터뷰] 독립유공자 고창일 선생의 딸 고인나 씨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19/09/04 [20:42]
독립유공자 고창일 선생의 딸 고인나(Mrs. Inna Koh Pyen, 한국 이름 고정희)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고인나 선생은 인터뷰 도중 아버지 고창일 선생을 아빠라 부르며 어린 시절을 추억을 더듬어 나갔다. 고인나 선생 부부는 여주시 교동에서 7년 동안 살다가 지난 1일 여주를 떠났다. 인터뷰는 선생이 여주를 떠나기 전 교동 자택에서 진행되었다. 


▲ 독립유공자 고창일 선생의 딸 고인나 씨. 미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2009년 모국으로 돌아왔다. 여주시 교동에 7년 동안 살던 고인나 선생은 지난 9월 1일 가평으로 이주했다.     © 세종신문


고향이 어딘가?

아빠의 본적은 함경북도인데 8살 때 러시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제정러시아 장교로 복무했다. 아빠는 러시아에서 성년을 보냈으니 그곳이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는 한국 사람이지만 러시아에서 출생해 해방 후 한국에 나올 때 까지 러시아와 하얼빈에서 생활했다. 두 분은 상해임시정부 청사에서 독립지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다.

나는 1937년에 하얼빈에서 태어나 해방 후 서울로 나올 때까지 그곳에서 성장했다. 학교는 청계초등학교, 이화중학교, 이화고녀, 이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30년 넘게 교사를 했다. 


여주에는 어떤 인연으로 오게 되었나?

미국에서 30년 교직생활을 마치고 2010년 경 부산 ‘리베(RIBET) 영어학교’ 교장으로 청빙되어 한국으로 왔다. 7년 전 계약이 끝난 후 이화고녀 시절 친구가 여주에 자기 집이 비어있다고 와 있으라고 해서 여주로 왔다. 여주에 와 보니 자연환경과 인심이 좋아 눌러 앉게 되었다. 특히 광현교회와 인연을 맺으면서 교인들로부터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으며 즐거운 생활을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

나는 막내딸이라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독립운동 하느라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아빠는 해방 후 서울에 와서 독립운동 동지, 선배들과 늘 교류를 하였는데 그 때 아빠를 많이 따라 다녔다. 김구 선생, 김규식 선생, 여운형 선생, 장택상 선생 등 많은 인사들을 만난 기억이 있다. 아빠는 김구-김규식 계통이라 이승만 박사가 등용을 하지 않았으나 장택상 외무장관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며 강력히 추천하여 외무부 초대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장택상 장관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면서 한동안 아빠가 장관 대행을 하였는데 그 당시 아빠이름으로 UN가입을 신청했다. 6.25때 경무대의 말을 그대로 믿고 모든 것이 안전하다고 여겨 외교사절단과 함께 남하하지 않고 있다가 29일 북한 보안원에 의해 끌려간 후 납북되었다. 


납북 이후로 아버지 소식을 전혀 못 들었나?

6.25전쟁 당시 아빠는 경무대의 말을 믿고 외교사절단들에게 서울은 안전하다고 알렸다고 한다. 28일 아침에도 경무대에 들어갔다 왔는데 그 날 새벽에 경무대는 다 떠나고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아빠는 본인이 직접 외교사절단들에게 안전하다고 했기 때문에 차마 혼자서 서울을 떠날 수가 없었다. 29일 북한 보안원이 총을 들고 을지로1가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옆에 있던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보안원들이 내 등에도 총을 들이댔는데 그때 아빠가 “그 총은 짐승을 사냥할 때 쓰는 총인데 치워라”고 호통을 쳤다. 그날 아빠와 엄마가 보안원에 의해 끌려가고 사흘 후에 엄마가 집 뒷문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집에 오자마자 “가자!” 하며 내 손을 이끌고 북아현동을 거쳐 뚝섬 친척집으로 갔다. 그 당시 뚝섬은 완전 시골이었다. 1.4후퇴 때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부산에서 이화중학교를 마치고 이화고녀가 생긴다고 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엄마는 아빠를 찾기 위해 적십자사를 통해 수없이 알아보았지만 끝내 소식을 듣지 못했다. 


고창일 선생은 어떤 활동을 하였나?

제정러시아 장교 제대 후 곧바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스물일곱에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단 일원으로 윤해 선생과 함께 1919년 2월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출발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갔는데 일본과 적색 러시아혁명군의 방해로 여정이 길어져 회의가 끝난 후인 10월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 긴 여정은 아빠가 불어로 쓴 기사에 잘 요약되어 불란서 신문 재사뚜(Je Sais Tout : 1920.5.12.)에 기재되어 있다. 비록 파리강화회의 참석은 무산되었으나 아빠는 파리에서 언론활동, 강연 등으로 일본의 불법적 조선합병을 지탄하고 조선독립을 주장했다. 귀국 후에는 독립을 위한 고려공산당 창당을 주도했으나 후에 탈당하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독립당도 탈당하고 난징주재 임시정부활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활동분야는 주로 외교와 독립자금마련이었다.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국가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나?

아빠가 납북되고는 그 어떤 국가적 혜택도 없었다. 언니가 UN에서 근무했는데 언니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80년대 중반에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지원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부터 오빠와 조카는 혜택을 받았지만 나는 미국 국적이라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10년 전에 한국에 돌아와서 독립지사들을 기리고 본인과 유족들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했다. 얼마 전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겨 한국 국적을 다시 취득하고 보훈급여혜택을 받기 시작한지 반년이 되었다. 지금은 의료혜택도 받고 있는데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우리 어머니 살아 생전에 이런 혜택을 받으셨다으면 크게 위로 받으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 고인나 선생과 남편 변종서 선생. 변종서 선생은 미국 연방정부에서 30년 간 근무한 행정전문가다.     © 세종신문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아버지가 자랑스러울 때는 언제인가?

미국에서 살 때 한국이 잘하고 있을 때는 괜히 우쭐해지고 한국이 뭔가를 잘 못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면 목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있고 그랬다. 미국에서 현대가 만든 빨간색 소나타 승용차를 살 때는 정말 감격했다. 한국이 승용차를 만들어 미국에 수출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었다. 
아빠가 목숨을 걸고 지킨 나라, 나의 조국이 나는 언제나 자랑스럽다. 아빠는 언제나 정직하고 올바른 분이셨다. 아빠가 외무부 차관시절에 우리 집에는 항상 미제 세단이 대문 앞에 서 있었는데 나는 한 번도 그 차를 타보지 못했다. 국가에서 보내준 차라며 개인적으로 절대 타지 못하게 하셨다. 비록 아빠는 납북 되셨지만 때때로 독립기념식이나 현충원 행사 때 나라와 백성들이 독립지사들을 기억해 주는 장면을 보면 우리 아빠도 그 과정의 일부를 감당하셨다는 생각에 자랑스러웠다.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엄마는 내가 자리를 잡고 미국으로 모셨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빠가 돌아오실 거라고 믿고 계셨다. 엄마는 늘 아빠를 기다려서 어느 날 내가 안타까운 마음에 “40년을 감옥에서 사는 것 보다 그냥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엄마가 엄청 섭섭해 하셨다. 그렇게 엄마는 아빠를 끝까지 기다렸다. 우리 엄마는 아흔 두 살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는 치매를 앓았다. 하루는 엄마가 “아버지가 오신 것 같은데 이리(미국으로) 건너오실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찾아 가는 것이 좋은지 물어봐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한일 간의 갈등이 심한데 어떻게 생각하나?

일본이 아직도 자신의 과오를 충분히 반성하지 않고 과거사 문제를 경제 무역 문제로 확대한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지식인과 일반 국민이 다음 정치지도자들을 선출할 때 극우주의를 극복하고 국제도의와 협력을 실행할 지도자들에게 정권을 맡겨 주었으면 한다. 또 우리 국민은 일본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베와 극우주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다. “No Japan”이 아니라 “No Abe” 또는 “Japanese-Yes, Abe-No”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후대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3년 전에 뇌경색이 와서 반신이 마비가 되었다가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남편이 많이 도와주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요리를 할 수는 없다. 자꾸 그릇을 떨어뜨리거나 놓친다. 생활하기가 어려워 9월 1일 자로 가평에 있는 실버타운으로 들어간다. 남편도 나랑 동갑인데 같이 간다. 여주에 정이 많이 들었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섭섭하다. 

후대들에게는 나 자신의 일에만 과다하게 집중하지 말고 내 주변의 일에도 관심과 배려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시민의 태도라고 말하고 싶다. 조국이 있어야 내가 있고 조국이 잘 살아야 내가 잘 사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정직함이 정말 큰 힘이라는 것을 우리 후대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9/09/04 [20:42]  최종편집: ⓒ 세종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 여주대교의 아침, 달라진 풍경
가장 많이 읽은 기사
여주시 추진 ‘농민수당’ 조례안 부결… 농민들 강하게 반발 / 김영경 기자
[마을탐방] 어르신 건강 프로그램 ‘구양리 행복교실’ / 김영경 기자
이통장연합회·농단협·상인연합회, 농민수당 조례안 부결 공동규탄성명 발표 / 김영경 기자
이항진 여주시장, 한국지방행정연구원 개원 35주년 기념세미나 참가 / 이재춘 기자
여주세종문화재단, ‘2019 한글날 학술대회’ 개최… 해마다 이어가기로 / 송현아 기자
제1회 여주에코포럼 개회...여주에서 세계 생태·환경문제 종교간 담론 시작 / 김영경 기자
여주문화원 김문영 원장, 문체부 장관 표창 받아 / 김영경 기자
능이버섯 채취로 마을소득 올리는 도전2리 주민들 / 이재춘 기자
여주역세권 학교시설복합화 사업, 국비 90억 확보 / 김영경 기자
한글시장에 나타난 ‘꼬마 보부상’ / 송현아 기자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