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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23] 여주 상업의 중심 중앙동 하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7/15 [15:52]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중앙동 하리 전경.     © 세종신문

하리의 유래

하리는 여주시의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중앙동의 관할에 속한다. 남한강의 흐름을 기준으로 여주읍내의 아래쪽에 있다 하여 아랫동네·하동네·하동이라 부르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리로 명명되었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 한강변에 형성된 이곳 읍내의 지형이 달리는 배 모양이라 뱃머리에 해당하는 마을을 상리,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이 마을을 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후 여주군 여주읍에 속하였다가 2013년 9월 23일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여주읍이 폐지되고 여흥동·중앙동·오학동의 3개 행정동이 신설되었으며, 여주읍에 속하였던 하리는 중앙동 관할의 하동으로 개편되었다. 

문화재로는 강한사(경기유형문화재 20), 대로사비(경기유형문화재 84) 등이 있다.  

▲ 대로사 강당.     © 세종신문

우암 송시열 사당 대로사
 
대로사(大老祠)는 1785년 정조가 영릉(寧陵:효종대왕 능)에 행차하다가 생전의 송시열이 여주에 머물 때마다 이곳에서 영릉을 바라보고 효종을 기려 통곡하며 후진들에게 북벌의 대의를 주장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우를 짓도록 하고 친히 비문을 지었다. 건물이 지어진 그 해에 송시열에 대한 존칭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대로사’라 하였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철폐할 때 전국에 있던 송시열의 서원·사우 44개소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강한사’로 이름을 바꾸어 대원군이 남겨놓은 47서원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에는 대로가 둘이 있었는데 우암 송시열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흥선대원군이 대로라 불리게 되자 우암의 사당인 대로사가 강한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정조의 친필로 된 대로사비(경기유형문화재 84)가 있고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인조 11년(1633) 생원시에 급제하여 경릉참봉을 시작으로, 나중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고,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청나라에 당한 병자호란의 복수를 위한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효종 승하 후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 씨의 복제문제로 이른바 ‘예송논쟁’을 일으키며, 노론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이다.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 청주의 화양동에서 은거하던 중 숙종 15년(1689) 나중에 경종이 된 왕세자의 책봉문제로 상소하였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국문을 받기위하여 서울로 올라오던 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 영월루에 있는 하리삼층석탑.     © 세종신문

하리삼층석탑(보물 제92호)

여주읍 하리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창리삼층석탑과 함께 현재 위치인 영월루 아래 공원으로 이전하였다. 탑 이전시 1층 탑신에서 특이한 사리공이 확인된 바 있으나 내용물이 남아 있지 않아 이 둥근 구멍이 무슨 용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리삼층석탑은 신라 이래의 전형양식을 계승하여 2중 기단 위에 쌓아 올린 3층의 방형(方形)석탑으로 높이 3.7m의 일반형 석탑이다. 하층 기단의 구성은 일반적인 방식에 속하여 갑석은 상면에 현저한 경사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삼층 기단 중석을 받치기 위한 높직한 2단의 받침이 있다. 삼층 기단 중석은 4매의 판석으로 구성하였는데 2면에는 기둥형태 모양의 우주(隅柱)를 모각(模刻)하되 이 우주형은 측면에까지 각출되었고 다른 2면에는 평편한 판석을 그 사이에 삽입하는 구성형식을 취했다. 갑석은 평평하면서도 얇은 편이고 밑에는 얕은 부연과 상면 중앙에 역시 높은 2단의 받침이 있다. 각층 탑의 몸체인 탑신석에는 우주형이 얕게 조각되어있고 초층 탑신은 특히 높은 편이다. 옥개석의 각층 받침은 4단이고 추녀 밑은 아랫면과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반전되었다. 상륜부는 완전히 소실되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하리삼층석탑의 조성은 고려시대였을 것이나 외형의 온아한 비율이나 각 부분 구성의 규율성으로 보아 고려 중기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 여주오일장 풍경.     © 세종신문

경기도의 자랑 ‘여주5일장’
 
여주장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시장이 없는 곳에 장이 생기기 시작하여 생활필수품을 거래하게 되었고 쌀, 금, 은 등이 화폐의 대행을 이루는 물물교환이 성행하여 정책적으로 교환율을 정하기도 했고 폭리에 대해서는 사법제도를 만들어 범법자를 처벌하기도 했다. 그 당시 생산처별로 장이 섰는데 여주는 대신면 지역에 등신장. 방근곡처(점동면 처리), 신지처(능서면 신지리), 신내이처(흥천면 신근리)등이 있었다.

조선 초 농본정책이 중시되고 상업이 억제되었으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사행상이 두드러지게 되고 지방의 시장도 그 수효가 증가하여 점차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한강의 이용수단이 생기게 되었고 그에 따라 관선, 병선, 사선이 생기게 되었다.

세종대왕 시기에 여주 양화군에는 정조 250석 적재적량의 조선이 15척, 그 이하 사선포함 20여 척이 있어 이때 이미 상공업이나 교통이 고도로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강을 이용한 상선들은 주로 농산물, 임산물을 수송해 가고, 올 때는 해산물(생선, 새우젓, 소금)을 외지에서 수입해왔다. 조선시대에 여주의 시장분포 사항을 살펴보면 여주장, 천령장(천양장이라 부름)과 억억장(후에 흥천장)이 제일 먼저 생기고 가장 번성하였다. 그 다음으로 안평장(후에 청안리로 옮김), 곡수장, 궁리장(금사면 궁리)등이 생겼고 그 후에 다시 태평리장이 생겼다. 

해방 후에는 대신장, 북내장, 주암장, 상품장 등이 생겼으나 해방 후에 생긴 시장은 대부분 폐장되었다. 여주에서 외지로 나가는 수출품은 도자기 이외에 가내공업품으로 한지, 자리, 약초류 등이 있었다. 1965년도에는 여주군의 시장수가 11개였고 70년대 이르러 여러 종류의 잡화를 다루는 도매업, 소매업 등의 상점이 늘어나면서 시장수가 줄어 현재의 가남장과 대신장, 여주장만 서고 있으나 여주장은 그 규모가 다른 장에 비할 바 없다. 

[마을人터뷰] 엄광현(75) 선생

▲ 하리에서 속옷가게를 운영하는 엄광현 선생.     © 세종신문

하리시장에 대한 기억은?

하리시장이 1961년에 처음 생겼거든. 그 때는 평평했었어. 건물도 없고 그냥 노점상이 와서 장사를 했어. 그 때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야. 여흥농협 있는데 여기를 구 장터라고 그래. 원래는 거기가 시장이었는데 거기 시장 서는 거는 못 봤고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더라고. 

여기가 넓어. 2,300평이거든. 이 일대가 군유지로 넓은 공터였다. 넓어서 5일장이 서고 장  안 서는 날은 공도 차고 그랬지. 그러다가 그 곳에 건물이 들어 선 것은 68년 경에 목조 건물로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금 건물은 70년대 중후반에 들어선 거야. 시작 안쪽은 우시장이었어. 

언제부터 하리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나?

태어나긴 단현리에서 태어났지만 하리 시장에서 50년 넘게 장사를 하고 있다. 1970년 4월 25일 제대를 하고 부터 여기서 쭉 살고 있다. 제대 하자마자 하리시장에서 노점으로 속옷을 팔기 시작했어. 속옷 노점을 처음 시작할 때는 가마니 하나 뜯어서 깔아 놓고 그 위에 속옷을 펼쳐 놓고 팔았다. 

군대 제대하고 돈 4만원 들고 서울 가서 물건을 떼는데 그 때는 참 기가 막혔지. 을지로 중앙시장에 갔는데 지금은 평화시장이야. 1번 가게부터 들어가는 거야. 들어가자마자 군대식을 경례를 ‘충성’ 하는 거야. 그러면 서울 사람이 “당신 뭐야?”하면 “저 경기도 여주에 사는 아무개입니다. 제가 먹고 살려고 서울에 왔는데 돈은 조금밖에 없으니 사장님들이 물건을 보내주시면 내가 이걸 가지고 열심히 장사를 해서 외상값 딱딱 갚으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고 외상을 달라고 한거야. 서울 사람들이 “그래. 거 시골 사람이 용기는 대단하네. 자네 돈은 있나?”하고 물어서 “돈 4만원 밖에 없습니다”그러면 “에이~” 그래. 그러고 지나가면 등 뒤에서 “아이 뭔 저런 또라이가 왔나” 그런 소리가 들려. 중간 쯤 가니까 나이가 듬직한 사장님 한 분이 “자네 그렇게 배짱이 있어?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어” 하면서 앉아보라고 해. “필요한 게 뭐야?”라고 물어서 난 아무것도 모르니 구색을 좀 맞춰 달라 그렇게 해서 4만원 내고 나머지는 외상을 달고 한 박스 물건을 받아왔어. 

그 속옷을 가마니에 펼쳐서 노점으로 팔기 시작하는데 흙먼지가 뿌옇게 앉고 그랬어. 여주에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마니에 속옷을 펼쳐놓고 팔고 있으면 친구 아버지, 어머니가 지나가면 창피해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팔고 그랬지. 
 
하리시장의 개선점은 무엇인가?

여주에서는 하리가 제일 낙후했어. 내가 많이는 안 다녔지만 그래도 전국의 도시라는 곳은 다 다녀봤는데 상설시장이 없는 도시는 여주밖에 없다. 

여주는 재래 상설시장이 없어. 어떤 곳은 조그마한 면단위도 상설시장이 있는데 말이야. 내가 이천장, 장호원장, 원주시장 이런 대를 다 다녀봤는데 그 곳은 시장이 정리가 딱 되어 있다. 광주장 같은데도 노점상 때문에 골치가 아픈 곳이었는데 역대 광주 단체장들이 싹 다 정리했어. 양평시장도 김선교 군수 때 여주보다 훨씬 좋게 만들어 놨다. 다른 데 시장군수들은 재래시장을 다 저렇게 번듯하게 만들어 놓는데 여주시장(단체장)은 그만한 능력이 있는데 왜 안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여주 공무원들은 일을 안하려고 한다. 

시를 상징하는 시장이 이렇게 지저분한 곳은 여주밖에 없다. 임창선, 이기수, 김춘석, 원경희 시장 임기 동안 다 이야기 했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 이항진 시장은 어떻게든 해 줄 거라고 우리는 또 기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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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7/15 [15:5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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