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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25]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북내면 중암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8/03 [13:55]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중암리의 유래

본래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의 지역인데 1906년에 여주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중산과 동암의 이름을 따서 중암리라 했다. 자연마을으로 중산, 동암, 건너말, 녹수골, 가창골, 진원, 완장이, 돌산 등이 있는 산간마을이다.

중산은 중암리의 으뜸 되는 마을이고 동암은 중산을 기준으로 완장천 건너 서쪽 마을이다. 녹수골은 중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약수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가창골은 동암 복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론은 녹수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과 완장동은 지론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중암리는 소달산 중턱에 천년 고찰 흥왕사가 자리하고 있어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다. 

▲ 여주시 북내면 중암리 고려백자터.     © 세종신문

고려백자터
 
고려 미술은 신라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중국 송나라 미술을 받아들여 점차 고유한 발달을 하게 되었다. 특히 호화로운 귀족미술을 발전시켰는데 고려의 미술에서 눈부신 발전을 보인 것은 공예였다. 고려의 공예 중에 더욱 큰 발전을 이룬 것은 도자 공예였다. 신라시대의 토기나 도기 단계를 넘어서서 이미 고려초기인 10세기 전반기에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도자기의 중심은 청자지만, 이 시대에도 백자가 제작되어 고려인의 도자 공예의 기능의 우수성과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북내면 중암리에서 발견된 가마터는 용인 서리 가마터에 이어 고려백자 연구에 대한 중요한 연구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중암리 가마터는 1999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여주지역 가마터 지표조사 과정에서 해무리굽, 완과, 화형접시, 갑발 등이 수습되면서 고려초기의 가마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경기도박물관에서 2001년 7월~10월과 2002년 11월~2003년 2월에 걸쳐 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발굴결과를 바탕으로 여주지역 도자사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 기초조사 및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주 중암리 유적은 고려백자를 생산한 요지로 고려초기의 백자의 발생 및 발달과정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도자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암리 고려백자 유적은 인근 현암리에 고령토 광산이 있고, 중암리 주변에도 백자를 생산하기 위한 질 좋은 백토(물토) 원산지가 분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 가마의 화력을 공급할 수 있는 땔감과 작업에 필요한 수원이 풍부하며 또한 협곡과 하전을 이용한 교통로가 발달하여 자기의 재료 및 완성된 자기의 이동과 공급이 용이하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한편 중암리 인근 지역의 불교유적으로는 상교리에 고달사지와 신륵사가 있으며, 남한강과 지류 하천로를 따라 점동면에 원향사지가 있고 원주 부론면에 거돈사지와 법천사지 등 대형 사찰터 등이 남아 있다. 이들은 고려시대 크게 번성한 불교유적으로 중암리 백자요지와의 수급관계를 상정해볼 수 있다.

▲ 비 오는 날 흥왕사 전경.     © 세종신문

천년고찰 흥왕사

여주에 있는 전통사찰 3곳 가운데 하나이다. 신라시대 소달이라는 도승이 절을 창건하기 위하여 100일 기도를 마치고 산을 둘러보는데 초여름인데도 하얀 서리가 내려 이곳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1905년 창석산인이 쓴 「법당중건상량문」에 의하면 고려 나옹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관련 기록과 유물이 없어 정확하지 않다. 『봉은본말지』에는 이 사찰이 1905년까지 상왕사(霜旺寺)로 불렸음을 전하고 있어 근대에 들어서 새롭게 중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흥왕사의 중창은 근대에 들어서 활성화되었다. 사찰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1905년 돈묵 스님이 법당을 중건하였고, 1922년에는 성묵 스님, 1932년에는 주지 윤익 스님 등이 계속 중수하였다. 한편 1933년에는 동요사, 1938년에는 서요사, 1943년에는 법당을 지었다. 또한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사찰의 진입로가 정비되는 등 본격적인 사찰 주변의 정비 작업이 이루어졌다. 경내 건물로는 극락전과 삼성각 등이 있다.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주심포의 팔작지붕집이다. 한편 부근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이는 3층 석탑도 자리하고 있다. 

흥왕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상교리의 고달사를 창건한 고달과 흥왕사를 창건한 소달은 형제였는데, 고달이 고달사를 창건한 것은 절을 오래도록 존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이 절터에서 태어날 장사를 훌륭히 키워서 국가를 보위하려는 목적으로 이곳에 절을 창건했기 때문에 고달사는 일찍이 폐사 되었고, 소달은 절을 불교의 도장으로 오래도록 존속시켜 중생을 교화, 제도하겠다는 목적으로 이러한 지맥을 따라 사찰을 창건하였으므로 흥왕사가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 북내초등학교 운암분교.     © 세종신문

북내초등학교 운암분교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중암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로, 북내면 당우리에 있는 북내초등학교의 분교이다. 1965년 9월 1일 북내국민학교 운암분교로 개교하였으며, 1969년 3월 운암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가, 1989년 북내국민학교 운암분교로 편입되었다. 교훈 '큰 꿈을 키우자'를 실천하고 있으며, 학교를 상징하는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개나리이다. 학교 총부지면적 13,684㎡, 교사대지면적 6,842㎡ 위에 1층 건물로 지어졌다. 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가을운동회가 있는 날은 온 마을사람들이 다모여 마을축제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人터뷰] 김영순 선생(85세)
 
언제부터 중암리에서 살았나?

고향은 강원도 원성군(원주) 지정면이다. 섬강 건너에 문막이 있다. 열네 살에 가족이 전부 중암리로 이사를 왔다. 왜정 말에는 처녀들이 일본 놈들에게 끌려가는 공출이 있어서 열다섯 살만 되면 시집을 보냈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큰 언니가 여기 중암리로 시집을 와서 살고 있었다. 내가 열네 살에 처음 이사 왔을 때도 중암리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가구 수가 한 60호 되었다. 저 건너 산 밑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서당을 차려놓고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지정면에서 소학교를 다녀 글도 알고 숫자도 아는데 이곳 아이들은 학교도 안 다니고 아라비아 숫자도 모르고 한문을 배우고 있었다. 예전에는 개천 둑 옆에 아카시아 나무가 아주 큰 것이 있었다. 그 아카시아 나무에 그네를 매달고 뛰고 그랬다. 

▲ 북내면 중암리에 살고 있는 김영순 여사.     © 세종신문

결혼은 몇 살에 했나?

열일곱에 같은 마을에 사는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 우리 큰 언니가 뒷집 총각을 소개 한 거다. 남편은 나보다 여덟 살이 더 많다. 개천 건너 동암에서 중산으로 시집을 왔다. 시집오기 전에는 동생들과 그렇게 싸웠는데 막상 시집을 오고 나니 동생들이 그렇게 보고 싶었다. 시댁에는 시어머니, 맏동서와 시숙하고 남편하고 그렇게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2월에 시집을 왔는데 그 해 동짓달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옛날에는 새 사람 들어오고 3년 나기 어렵고 새 집 짓고 3년 나기 어렵다는 말이 이었다. 그러니까 동서가 나보고 ‘발복’이 없어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그랬다. 그때 우리 시어미가 예순 셋인데 어느 날 감기 몸살이 들어 앓았는데 약이라는 게 부엌 바닥의 그을린 진흙을 파서 물에 우려서 노랗게 우러나오는 물을 드셨는데 며칠 후 그만 돌아가셨다. 참 기가 막힌 시절이었다. 애들은 아들 하나에 딸 여섯이다. 옛날에 첫 아들을 낳았는데 실패했다. 그러다가 딸을 낳는데 다섯을 낳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족계획이 없었다. 다섯째 아이를 가졌을 때 가족계획을 하라고 계몽 나왔지만 아들 하나 낳으려고 그 계몽하는 소리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섯째를 낳았는데 또 딸이었어. 그래서 하나 더 낳았는데 이번에는 아들이었다. 우리 영감이 딸 다섯 낳고 아들 낳았으니까 하나 더 낳으면 또 아들일거라고 해서 하나 더 낳았는데 딸이었다. 그래서 딸 여섯에 아들 하나 있다. 고맙게도 다 잘 살고 있다. 
 
완장천이 예전에는 아주 맑았을 것 같은데?

중암리는 우물이 따로 없었다. 개천이 바로 우물이었다. 개천 물로 밥도 해먹고 빨래도하고 그랬다. 그 때는 개울에 풀도 없고 아주 깨끗했다. 여름이면 그 개울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한가득 들어앉았고 그랬다. 겨울에 개울이 얼면 돌로 얼음을 깨고 물을 떠 물동이에 이고 갔다. 그러다 동네에서 한 집에서 우물을 팠는데 그 집에 물을 길러 가면 그 집에 계신 노인이 우물에 붕어가 있는데 두레박이 떨어지면 붕어 죽는다고 야단을 하서 물도 잘 못 떠오고 그랬다. 그러다가 동네에서 한두 집 수동펌프를 놓기 시작했다. 지금은 물이 너무 더러워졌다. 이 위로 골프장 생기지, 돼지농장 있고, 소 키우고, 콩나물 공장 있고, 수녀원 있고 그러니 물이 많이 더러워졌다. 지금은 개천 물에 손도 못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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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8/03 [13:5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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